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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날들/2007 마이아 다이크

추석맞이 아우팅 해프닝



나에게는 정신적으로 아픈 가족 A가 있다.

그간 약을 잘 먹으며 평화롭게 살았는데 요즘은 정량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도로 이상해 졌다.
물론 평생을 약을 먹으며 사는 것을 고역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변비가 생기는 것도 괴로울 것이다.

그렇지만, 약효가 사라져가니 그가 후벼팠던 십년전의 아팠던 상처들이 새록 새록 기억속에 떠오른다. 환자인 줄 모르고 미워했던 시절을 흘려보낸 것도 얼마 되지 않는데, 또 재발이라니. 힘들다. 그나마 함께 살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지난 추석이었다.
엄마와 선물 바구니를 바리 바리 들고 외갓집 문턱을 넘는 나를 발견한 가족 중 일원인 B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외할머니, 울엄마, 큰외삼촌 내외, 그 집 장성한 딸과 아들, 둘째 삼촌 내외, 그집 장성한 딸이 있었다.

"A가 이제 쟤를 걸고 넘어지잖아"
아마 식구들을 돌아가며 미워하는 것은 환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일 것이다. 그 미움의 타겟이 내가 된 것이다.

"쟤는 왜 여자랑 동거를 하냐는 거지"
"쟤가 동성연애자냐 뭐냐면서"
이 말을 듣고는 나는 대뜸, 그게 A랑 무슨 상관이래?라며 식구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의 내가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동성연애자'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이 아니라는 것을 못해준 것이 못내 아쉽다. 요즘은 동성애라고 한다는 것, 여성 동성애자를 레즈비언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B의 마지막 정리멘트가 고마웠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쟤가 동성연애자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A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그랬지."

순간 모든 식구들에게 이렇게 정리가 된거다.
쟤는 '동성연애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쟤가 '동성연애자'건 아니건 그건 각자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걸로 시비거는 것은 환자나 할 짓이다.

아니 B는 도대체 어떤사람인가? 그에게 고맙다.

이 해프닝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대뜸 추석선물을 할머니께 내밀며,
제 친구와 함께 드리는 거에요. 했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유 근데 왜 맨날 친구랑 함께 선물을 하니."하셨다.

그 이면에는 '그 친구랑 정말 동성연애를 하는 거냐?'가 숨어있는거겠지.
예전이라면 긴장했을거다. 겁먹고 말도 안되는 말로 둘러대거나, 아니면 나와 내친구의 선물이라며 할머니께 드리는 일을 아예 하지 않았을거다.

그렇지만 나는 강해졌다. 건강한 관계를 가진, 멋진 동반자를 가진 자의 자부심과 충만함이 나를 튼튼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할머니를 사랑하니까요.라고.

이런 해프닝에도 나는 멀쩡하게 식구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하루를 잘 보냈고, 외갓집을 떠나는 길에 늘 그랬듯이 할머니께 열렬한 뽀뽀와 포옹을 하며 현관을 나서려고 했다. 그랬더니 할머니 말씀, "니가 자꾸 이러니까 A가 질투를 하잖니." 그에 대한 엄마의 말이 걸작이다. "그래 할머니랑 너랑 너무 다정하고 그러니까 괜히 A가 니가 걔랑 사는 거 시비거는 거지. 자기는 아무도 없는데 너는 누가 있으니까."

우리 식구들은 내가 누구와 살던, 동성연애를 하던 별로 상관이 없나보다.
기쁘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커밍아웃을 준비해야겠다.

어쨌든 나는 추석 아우팅 해프닝을 통해 내가 많이 성장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건강하고 튼튼한 다이크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아자! 아자!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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