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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보컬레슨

노래 잘 해보자! with Ziihiion


내가 중요하게 하는 일 중 하나는 보컬 레슨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 음악과 관련된 돈벌이를 하고 싶기 때문에 지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2004년쯤 처음 보컬레슨을 시작했으니 벌써 십년이 되었다.

대안학교의 강사로, 찾아가는 노래 교실 프로젝트로 위안부 할머님들과 탈성매매 언니들과의 노래수업을 진행하는 강사로, 그리고 최근의 개인레슨의 강사로 까지... 다양한 대상들에게 다양한 성격의 노래 지도를 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 보컬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교육기관-재즈아카데미라던가...-을 다녔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엔 너무 두려웠다.

특히, 부단한 노력으로 득음을 했다거나, 음악적인 성취를 한 경우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나는 그냥 어떤 재능을 타고났고, 그걸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운좋게도 마침 그걸 좋아했던거다.

아무튼, 나의 가수, 뮤지션으로서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나의 학생들도, 나의 노래를 좋아하는 청자들도 궁금할 것이다. 

나의 첫 무대는 교회였다. 음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시작하는데, 나도 그랬다.

국민학교 2학년 꼬꼬마 시절,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을지로에 있는 초대형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꼬꼬마였는데 어떻게 유년부 예배를 혼자 드렸는지 모르겠다. 엄청 성숙했는지... 암튼 2학년이니 유년부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성가대를 뽑는다는 공지를 들었다. 예배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성가대 연습실로 찾아갔다. 엄마 없이 혹은 보호자 없이 성가대에 오디션을 보러간 사람은 아마 나 뿐이었을것이다. 틀림없다. 처음만난 지휘자 선생님은 아주 불친절하고 무서운 여자 선생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만... 20대 중반 정도? 하하... 나에게 발성 몇가지를 시켜보더니 불합격이라는 거다. 속상했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속상했다.

다음 해 3학년이 되던 겨울 방학에 편도선 수술을 받고 다시 오디션에 응시했다. 그리고는 기쁘게도 합격! 기뻤다. 목이 트인것 같다고 했다. (그게 편도선 수술의 영향인지는 모르겠다. 쩝) 그때부터 나의 성가대 생활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나의 뮤지션으로서의 삶도 시작되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당시 국내에서는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교회였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성가대 지휘자가 되려면 음대 전공자여야 했고, 반주자가 되려면 피아노 전공자여야 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모여서 발성 연습과 성가 연습을 했고, 일요일에는 가운을 입고 단상에 섰다. 서울안에서 내로라하는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성가대여서 나는 솔로, 헌금송 한 번 할 기회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의 음악적 토대를 다지기에는 충분한 기회였다. 

성악을 전공한 지휘자 선생님 덕에 발성하는 법을 배웠다. (그 선생님은 아주 신경질적인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노래는 참 잘했다.) 배에 힘을 주어

소리를 모아 코로 보내 이마로 나오게 하는 두성을 연습했고, 음정을 정확하게 내는 것을 연습했다. 매주 새로운 악보를 받아 노래를 해야했으니 악보를 읽게 되었고, 음역대가 낮은편이라 알토 파트를 노래해야해서 옆자리에 앉은 소프라노와 테너, 베이스의 소리를 들으며 하모니를 만드는 연습도 했다.

교회에 가는 것은 즐거웠다. 노래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매주 나는 아주 잘 차려진 무대에서 격식을 갖춰 연주하는 경험을 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앞에서 노래하는 태도를 연습했고, 나는 꽤 잘했다.

국민학교 3학년, 10살부터 19살때까지 꾸준히 성가대에 참여했으니 만 아홉해는 성가대로서 노래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때 많은 것들은 듣고,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나의 몸의 경험도 또 쌓였다. 

그때 내 안에 쌓이게 된 지식들을 지금 보컬 레슨을 하는데 다 써먹고 있다. 

나는 이런 역사를 가졌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