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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생각들

버스, 두려움의 공간

공공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에 의해, 최초로 성폭력을 경험한 것은 국민학교 5학년때이다.

겨울이었고, 성산동에 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엄마와 버스를 타고 당시 번화했던 신촌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왔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국민학교 고학년이던 나는 뭔가 자신 만만한 상태로 엄마 손을 놓고는 혼자서 버스 뒤쪽으로 성큼성큼 이동했다.

복잡한 만원 버스에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말이다.

공기는 답답했고, 다른 사람들과 너무 밀착되어 몸도 답답했다. 

그러던 중 스멀스멀 불쾌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몸 뒤쪽에서.

엉덩이 아래에서.

버스 창으로 비치는 모습을 봤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남자 고등학생이 서있었다.

그 놈이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창을 통해서 그 놈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1초가 천년처럼 느껴졌다.

버스는 나에게 친절한 공간이었다.

노인이 타면 자리를 양보하고,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이 앞에 있으면 짐을 받아주고, 아이를 동반한 여성이나 임신한 여성에게는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그런 따뜻한 공간.

그런 마을 같은 공간이었다.

그 날 밤에도 나는 버스에서 그런 친절함을 기대했다.

나에게 안전한 공간. 나에게 친절한 공간.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 놈에게는 두려울 것 없는 공간이었고, 나에게는 숨막힐 듯한 두려움을 주는 공간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태어난지 겨우 11년하고 7개월쯤 되었을때 겪은 일이었다.

아마도 그 날부터 버스가, 지하철이, 바깥 세상이 두려워졌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대중교통이 두렵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너무 힘들다.

멀미가 나고, 온통 신경이 곤두서 이동중에 이미 녹초가 된다.

온 세상이 여자애들에게 적대적이다. 아니라고 하지 말아라. 나만 재수없었던 거라고 하지말아라. 나를 비난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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