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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생각들

나의 불안한 나날들

벌써 8월의 마지막 날.
오늘 씨디 케이스가 인쇄, 재단되어 도착했다. 이제 한땀한땀 공들여 씨디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일만 남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디자인 전공 학사학위 취득자인 나에게 엄마가 내민 타협의 카드였다. 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한다면 음악하는걸 인정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았으며, 엄마가 나에대해 포기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나의 의지 반, 엄마의 권유 반으로 대학원에 갔다.

종합대학의 돼지저금통 같은 특수대학원에 개설된 컴퓨터음악학과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겨우 한학기를 다니고 휴학을 했다. 그래도 거기서 신세사이저의 개념, 미디의 개념, 이런저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법을 익혔다. 나름 음악치료에 대한 공부도 혼자 했다.

암튼 휴학을 한 나는 조급했졌다. 주머니에 돈은 없었고, 데이트를 하려니 돈이 필요했다. 졸업반일때 만든 신용카드는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에 딸린 미술교습소의 원장격으로(나의 학사학위를 써먹었다) 취직했다. 내 또래였던 피아노 학원 원장은 피아노를 전혀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학부모를 속이며 원생들을 모았다. 그래서 자격을 가진 내가 필요했고, 보육교사 자격을 가진 유치원 선생이 필요했다.

월급은 80만원이었다. 11시쯤 출근해 유치원 아이들의 미술수업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초등반 미술수업을 맡아 진행했다. 의욕이 넘쳤다. 왠지 모든것이 잘 될것만 같았다. 나는 적금을 들었다. 불입금 60만원 한 달에 20만원만 쓰고 나머지는 다 저금했다. 거짓말로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은 종합적으로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다. 두 달쯤 되었을때 동갑이던 보육교사와 갈등이 있었다. 원장은 보육교사에게 이제 나오지 말라고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했고, 운동권 출신 보육교사는 노무사인 선배를 통해 원장에게 부당해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으며 원장은 보육교사에게 금전적인 배상을 해주어야했다.

이 과정은 나에게도 힘들었다. 동료교사의 부당해고, 비윤리적인 상사에 대한 불신. 나는 길고 긴 사직서를 썼고 석달을 다닌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에게 납입을 기다리는 적금통장만 남았다. 바로 해약. ㅠㅠ

돈은 늘 나를 조급하게 했다. 직장을 다니던 친구를 통해 임시직 웹디자이너 일을 하게 되었다. 월급은 150만원. 정말 달콤했다. 그 때 나는 차도 있었고, 엄마 덕에 번듯한 집에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독립이란 나 스스로 돈을 벌어야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 즈음 내가 무급인턴으로 일하던 청소년 센터에서 일본으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친구인 실무자는 나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일주일인지, 보름인지 한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150만원짜리 알바를 계속해야했고, 연애도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친구는 속상해하고 나를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달콤한 급여에 잡혀있었다.

당시 나는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무급인턴, 여성문화운동 단체의 배우 겸 가수, 페미니스트 가수. 게다가 연애까지. 처음으로 여자친구와 정식 교제 관계를 갖게 되었다. 20대 중반과 후반 사이였던 나의 삶은 혼돈과 혼란 그 자체였다.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무급인턴과 배우 역할을 정리하고 아르바이트와 가수의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바람둥이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우연히 정리가 되었다.

그 후로도 몇 년간은 불안했다. 돈이 충분히 있었던 적은 없었다. 2004-5년쯤 석사논문을 쓰면서 엄마 장학금에 기대기 시작했다. 독립을 선언한지 4-5년 만이었다. 그러다 2007년 엄마와 외할머니께 커밍아웃하고 난 후 엄마는 모든 지원을 끊고, 집에 남아있는 대출 원금과 이자도 함께 가져가라고 선포했다. 엄마 파운데이션의 지원이 끊기니 또 불안해졌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였다. 그래서 나는 또 알바와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가수로 생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시기는 3-4년 정도? 황금기였을때 반짝이었다.) 알바도 하고, 여성 문화 운동 단체 상근자로 취직도 했다. 직장에서는 친구였던 보스와의 갈등으로 3개월만에 퇴사. 상근자로 있는 동안 시작한 프로젝트로 1년 생활비는 벌 수 있었다. 

실은 지금까지도 돈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신기하게도 배 곯을만하면 일이 들어온다. 그건 입술에 있는 점 때문일까?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떻게 하면 꾸준히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여유있게 살고 싶은 마음. 그런데 발길 닿는대로 이리저리 흐르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삶이란 그런것 같다. 우연인듯 필연인듯 엮이고 짜이는 것.

거처를 잃고 길에서 살게되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것.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그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것. 그래 내가 했던건 그런거였구나. 

아, 그리고 또 중요한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기대거나,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리고 할 수 있게 되는 것.

(내가 사랑하는 나의 청년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다가 돌아보게 된 나의 청년 시절. 나도 그랬네. 나도 매일이 불안하고 힘들었네.)


(2017.8.31.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ziihiion.zenn/posts/10208225321671092?notif_t=like&notif_id=150418940587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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