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지개 날들/2007 마이아 다이크

커밍아웃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준비한 것일지도,
어쩌면 우발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레즈비언으로 커뮤니티에 데뷔한 것은 9년,
지금의 파트너를 만난것은 7년,
지금의 그녀와 남은 날들을 함께 하고싶다,고 결심한 것은 4년, (3년? 2년? ㅎㅎ)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한 것은 3년,
올 일년은 점점 커밍아웃 자신감을 키웠고,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활동을 하면서 더, 더, 더 비밀과 숨김의 상태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12월 9일 할머니와 엄마께 커밍아웃했다.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활동을 하면서,
동성애 허용 반대 엉아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과 멸시를 견디면서,
나는 어느 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몇몇이 기독교인인) 가족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최근 몇년간의 나는 관대하고, 여유있고, 성숙한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안정된 관계를 가진 사람의 아우라였달까.)

엄마는 나의 분노와 화에 무척이나 아파하고 슬퍼했고,
나는 이제는 드러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더 이상 거짓말 하거나,
나 혼자 감당하거나,
그럴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준비했다.

무슨 말을 할 건지 준비했다.
준비하던 와중 남성 동성애자 인권센터인 친구사이 http://chingusai.net 에서 발간한 커밍아웃 가이드 (나는 ishap센터에서 얻었다.)를 찬찬히 읽으며 꼼꼼하게 준비, 또 준비했다.

편지를 썼다.
아무래도 말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다가 잊어버리고,
울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 막혀버릴 것 같았다.
가족들 앞에서 낭독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편지를 썼다.

하고 싶은 말을 노트 한 장에 쓰고,
파트너에게 읽어주며 울고, 수정하고,

고친 글을 정서하며 다시 한 번 다듬고,
정서한 글을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적당한 단어들을 고르고, 지우고, 첨했다.

계획했던 날이 되어,
엄마의 전화를 받고, 엄마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져,
그만둘까?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렇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나의 마음은 양지를 향해,
거짓을 벗은 나를 향해,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강을 향해 뛰어드는 그 순간을 향해,
이미 달리고 있었다.

쪽지를 잘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할머니와 엄마가 계시는 집으로 향했다.
점심 모임이었으니,
밥을 잘 먹고, 소화 시키면 2시, 2시에는 낭독해야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시간은 흘러 2시 30분이 되고,
소파에 앉아있던 나는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드릴 말씀이 있어요."하며 쪽지를 펴들었다.
'좋은 일이냐?'며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는데,
"사는 얘기에요."라 대답했다.

준비한 편지를 낭독하며 나는 혼자 울었다.
집에 몇번이나 연습했는데도, 또 울음이 나왔다.

편지 낭독을 다 끝내고,
할머니의 반응, 엄마의 반응 다 덤덤했다.
엄마는 유명인사 중에 여자들과 함께 살았던 이들의 이름을 대며 이야기를 풀었고,
할머니는 밖에 나가서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말만 내뱉지 않으면 된다고 하셨다.
(동의 할 수 없었지만, 할머니가 받아 들이실 수 있는 범위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키로 했다.)

다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괴로워 하는 줄은 몰랐다,
얘기해 줘서 고맙다,
등등의 쿨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렇게 그날은 정리가 되었다.

어쨌든 나는 커밍아웃 한 것이다.

[2007/12/21]